보시기에 좋았더라!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떤 대답을 하십니까? 대부분은 “요즘 너무 바쁩니다.”라는 답을 한다. 하기야 백수도 바빠서 죽을 시간조차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듣는다. 효율성 위주로 시간이나 작업을 분담하고 생활을 ‘초’ 단위로 쪼개어 살다 보면 인간적인 이야기는 할 새도 없다. 수치화된 성과로 평가받는 세상이고 보니 사람들을 만나도 늘 기능적이기 쉽다. 정신없이 같이 일하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올려보면 정작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지?” “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가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퇴직해도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대체되어 업무를 이어간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의미를 부여조차 할 수 없다. ‘쓰이고 버려지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행여 시간이나 여건이 되어도 눈을 맞추고 서로에게 의미가 되려 하지 않는다. 금세 헤어질지 모르기에 그렇다. 이래저래 ‘사람’에게 집중할 수 없게 된 세상, 오로지 일이 주인이고 돈이 가치가 된 세상에서 사람은 도구가 되어 그저 주어진 시간을 버티며 살아갈 뿐이다.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삶도 중요하다지만......

이때 교회는, 한 호흡쯤은 쉬었다 가야 한다. 하나의 일을 놓고 분초를 다투던 일손을 멈추고, 서로 눈을 맞추고 한 사람 한 사람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계산하지 않고 서로를 탐색하느라 피곤해하지 않고, 마주 앉아 서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치유와 위로와 성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곧 ‘너’의 이야기이기에 그렇다. “‘나’라는 말이 ‘우리’라는 말로 대체되면 ‘아픔’도 ‘건강함’으로 바뀐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말컴 액스의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돌아서서 가는 그대의 등을 바라보는 것이다. 등 돌리고 떠나는 사람의 심정이 등에 담긴다. 앞모습은 화장이나 분장, 위장이나 변장으로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속일 수 없다. 등지면 악연이지만, 등 대면 인연이 된다. ‘길동무’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그네’로 존재한다.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 내 집이 있다는 의미다. 이 나그네 길을 혼자 가려는가, 아니면 동무와 가려는가?

설탕이 녹기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달콤한 삶, 아름다운 관계, 서로에게 의미 있기를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 기다림은 달달 하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가치관의 부딪힘, 자라온 배경의 다름에서 오는 엇박자,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짜증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 고비를 넘어가면서 서로를 알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결국 사랑하게 된다. 그때에야 우리는 달콤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목욕탕의 명언은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이다.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고, 누구에게나 시간이 필요하고, 때가 되면 잘 될 것이다.

봄의 한복판을 지나는 이때에 하나님의 감탄을 내 안에 회복하자. (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어디에서? 자연 속에서, 서로에게서, 일상의 삶의 모습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