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인기리에 방영 되었던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가 생각난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라는 말이다. 그 사람의 상황과 형편에 서 보면 이해한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2D로는 알 수 없고 3D로 봐야 한다. 단면이 아닌 입체적, 즉 그 사람의 뒷모습까지 봐야 그 사람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 가끔 만나 서로 예의를 갖추고서 자기방어 시스템을 작동시키면서 만나는 만남으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사회에서 하는 말 중에 '점당 최소 100 원짜리 고스톱을 쳐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통해서만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환대는, 한 영혼의 존중이며 인격 그 자체의 보둠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선입견으로,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듬는 것이다. 서로 마음의 빗장을 푸는 것에서 환대는 이루어진다. 수도원에 오는 분들을 맞이할 때 많은 경우 작업복 차림에 땀 흘리며 일하다가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그 모습에서 많은 분들이 마음을 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위 수도원복도 없고, 정장 차림도 아니고, 심지어는 고무신이나 작업화를 신고서 온몸이 땀에 젖어있고 다듬지 않은 머리로 맞이하게 되는 때에 의외로 이야기가 쉽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 까닭일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상대방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한 인격체로 그냥 보는 것이다. 거기에서 생명은 살아나고, 약동한다.
그래서 환대는 너와 나의 마음 빗장을 여는 것이다. 나의 어떤 기준으로 상대방을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나름의 판단 기준이 있다. 그러나 그 판단 기준을 허무는 것에서 환대는 시작될 것이다. 그래야 그 사람을 그 자체로 바라보며 품에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만나는 한 사람을 그대로 품으셨다.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셨다. 연민의 마음으로, 손잡아줘야 할 한 사람으로 사람을 만나셨다. 거기에서 살아남, 회복과 변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생겨났다. 한 인생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존중하며 품어준 결과이다.
나도 그 삶을 살아가고 싶다.
수년 전 인기리에 방영 되었던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가 생각난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라는 말이다. 그 사람의 상황과 형편에 서 보면 이해한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2D로는 알 수 없고 3D로 봐야 한다. 단면이 아닌 입체적, 즉 그 사람의 뒷모습까지 봐야 그 사람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 가끔 만나 서로 예의를 갖추고서 자기방어 시스템을 작동시키면서 만나는 만남으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사회에서 하는 말 중에 '점당 최소 100 원짜리 고스톱을 쳐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통해서만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환대는, 한 영혼의 존중이며 인격 그 자체의 보둠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선입견으로,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듬는 것이다. 서로 마음의 빗장을 푸는 것에서 환대는 이루어진다. 수도원에 오는 분들을 맞이할 때 많은 경우 작업복 차림에 땀 흘리며 일하다가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그 모습에서 많은 분들이 마음을 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위 수도원복도 없고, 정장 차림도 아니고, 심지어는 고무신이나 작업화를 신고서 온몸이 땀에 젖어있고 다듬지 않은 머리로 맞이하게 되는 때에 의외로 이야기가 쉽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 까닭일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상대방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한 인격체로 그냥 보는 것이다. 거기에서 생명은 살아나고, 약동한다.
그래서 환대는 너와 나의 마음 빗장을 여는 것이다. 나의 어떤 기준으로 상대방을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나름의 판단 기준이 있다. 그러나 그 판단 기준을 허무는 것에서 환대는 시작될 것이다. 그래야 그 사람을 그 자체로 바라보며 품에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만나는 한 사람을 그대로 품으셨다.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셨다. 연민의 마음으로, 손잡아줘야 할 한 사람으로 사람을 만나셨다. 거기에서 살아남, 회복과 변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생겨났다. 한 인생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존중하며 품어준 결과이다.
나도 그 삶을 살아가고 싶다.